알쓸신잡

어느 노인의 편지

포커스1 2024. 11. 19. 09:00

<어느 노인의 편지>
                / 이해인

사랑하는 나의 아들 딸들
그리고 나를 돌보아주는
친절한 친구들이시여

나를 마다 않고 살펴주는 정성
나는 늘 고맙게 생각해요.

허지만 그대들이 나를
자꾸만 치매노인 취급하며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교육시키려 할 적마다

마음 한구석에선
꼭 그런것은 아닌데....

그냥 조금 기억력이 떨어지고
정신이 없어진 것 뿐인데...
하고 속으로 중얼 거려 본다오

제발 사람들 많은 자리에서
나를 갓난아기 취급하는
언행은 안 했으면 합니다.

아직은 귀가 밝아 다 듣고 잇는데
공적으로 망신을 줄적엔 정말 울고 싶답니다.

그리고 물론 악의 없는 질문임을 나도 알지만
생에 대한 집착이 있는 지 없는지

은근슬쩍 떠보는 듯한 그런 질문은
삼가주면 좋겠구려

어려운 시험을 당하는 것 같아 내 맘이 편칠 않으니...

어짜피 때가 되면 생을 마감하고 떠나갈 나에게
떠날 준비는 되어 있느냐 아직도 살고 싶으냐

빙빙 돌려 물어 온다면 내가 무어라고 답을 하면 좋을지?

더 살고 싶다고 하면 욕심 많은 늙은이라고 할테고
어서 죽고 싶다면 우울하고 궁상맞은 푸념쟁이라 할테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나의 숨은 비애를

살짝 감추고 사는 지혜가 턱없이 부족하여
내가 가끔은 그대들이 원치 않는

이기적인 모습 생에 집착하는 모습 보일지라도
아주 조금만 용서를 받고 싶은 마음이지요

하늘이 준 복과 수를 다 누리라 축원하고
오래 살라 덕담하면 좋다고 고맙다고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이미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가능하면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평온한 죽음을 맞게 해달라
간절히 기도하고 있음을 알아달라고

오늘은 내 입으로 꼭 한번 말하고 싶었다오

그러니 부디 지상에서의 나의 떠남을
너무 재촉하지는 말고 좀 더 기다려달라 부탁하고 싶답니다.

나를 짐이 아닌 축복으로 여겨달란 말은 하지 않을 테니
시간속의 섭리에 맡겨두고 조금 인내해달라 부탁하고 싶답니다.

우리가 서로 빚진
사랑의 의무를 실천하는 뜻으로라도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말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어설픈 편지라도 쓸 수 있으니
쓸쓸한 중에도 행복하네요

어쨌든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나의 처지에
오늘도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지만

아직은 이렇게 살아 있음이
그래도 행복해서 가만히 웃어 봅니다.

이 웃음을 또 치매라고 하진 않을까
걱정되지만 그래도 웃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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