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상주의 천수관음상..이제는 고국으로 돌아올 때
불기 2569년 부처님오신날, 130년 동안 고국을 떠나 프랑스 박물관에 있는 경북 상주시 동방사의 ‘천수관음상’을 되새겨 본다.
1866년, 고종 3년.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을 명분으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했다. 이를 병인양요라 한다.
그러나 이 군사적 충돌의 이면에는 조선을 무력으로 열어젖히려는 제국주의적 의도가 숨어 있었다. 비록 프랑스는 이 전투에서 물러났지만, 20년 뒤인 1886년에는 결국 조불수호통상조약을 통해 조선과의 외교 관계를 성사시킨다.
이로써 프랑스는 자국의 학자와 탐사단을 조선에 보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고, 그 중 하나가 샤를르 바라(Charles Varat)의 문화탐사였다.
1888년, 프랑스 민속학자 바라가 이끄는 탐사단은 조선에 도착해 전국을 여행하며 유물을 수집했다.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은 이 탐사단은 “한 프랑스인이 희귀한 물건을 찾고 있다”는 소문을 공사관 차원에서 퍼뜨리며 적극적인 수집 활동에 나섰다. 그렇게 수집된 유물들 중 하나가 바로 오늘날 파리 국립 기메 동양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고려 철조 천수관음상이다.
높이 58cm의 이 불상은 고려시대 밀교의 정수를 품고 있다. 자비의 상징인 관세음보살은 천 개의 손과 눈으로 중생을 굽어살핀다. 이 불상에는 왼손 20개, 오른손 21개, 총 43개의 손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각각 경전, 보검, 정병, 법륜 등을 들고 있다. 머리 위에는 화불이 새겨져 있어 이 불상이 관음보살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철로 만들어졌지만 유려한 곡선과 섬세한 표정은 조각 예술로서도 뛰어나다.
더욱이 이 불상은 상주 동방사(東方寺)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불상 밑의 나무 받침대에는 '상주 동방사 암주가 발원하였다'는 묵서가 남아 있다. 동방사는 신라 말기에 창건된 사찰로, 상주의 지세를 안정시키는 비보사찰로서 중시되었다.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도 이 절에 머무르며 시를 남겼고, 이후 임진왜란으로 소실될 때까지 지역의 중심 사찰로 기능했다. 복룡동 207-2번지에 남아 있는 당간지주는 이 사찰의 실체를 오늘날까지 증명하고 있다.
샤를르 바라는 이 불상을 수집하며 ‘동방사 출토품’으로 기록을 남겼다. 현재까지 동방사의 유물임을 뒷받침하는 공식 사적기록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바라의 기록과 불상에 새겨진 발원문이 그 출처를 명확히 말해준다. 이는 단순한 예술품이 아니라, 한국 불교사와 지역사의 정수를 담고 있는 문화유산인 셈이다.
그러나 지금 이 유물은 외국 박물관의 한복판에서, 서양인의 눈요기로 전시되어 있다. 문화재 약탈과 반출의 뿌리는 병인양요의 시대적 맥락 속에서 비롯되었고, 그 불균형은 아직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이제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천 개의 손과 눈을 지닌 관음보살이 왜 조국을 떠나 타지에 서 있는가?
관세음보살은 세상을 굽어보며 중생을 구제하려 한다. 그 숭고한 정신이 담긴 이 불상이, 상주의 들판을 내려다보며 민초들과 함께 호흡하던 자리를 떠난 지 130여 년. 이제 우리는 이 유물을 되찾아야 할 문화적, 역사적 책임 앞에 서 있다. 문화재청과 외교 당국, 학계와 시민사회의 공동 노력으로 이 관음보살상이 마땅한 자리에,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며, 문화유산은 지키는 자의 것이다. 이제는 관음보살의 자비로운 눈빛이 다시 고국을 향하도록, 우리가 행동할 때다.
<포커스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