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호박에서 인간으로, 삶을 그리는 화가 박 한

5월, 따스한 햇살이 내려앉은 경북 상주 함창의 명주미술관 3층 카페. 그곳에서 만난 박 한 작가(1954년생)는 첫인상부터 구수한 말투와 시골 농부 같은 인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 안에는 40년 동안 한 길을 걸으며 예술로 인생을 써 내려온 작가의 진중한 열정이 깃들어 있었다.
박 작가는 한국 수채화협회 공모전 우수상(1986),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1989), 캐나다 Mill Pond Art 공모전 최고상(1997) 등 화려한 수상 경력을 지닌 원로 작가다. 2013년부터는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양화 부문 초대작가로 활동하며 국내 미술계에서 탄탄한 입지를 굳혀왔다.
특히 ‘호박 그림’으로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그는, 82년부터 무려 40년간 호박 하나를 오롯이 화폭에 담아왔다.
그가 말하는 ‘호박’은 단순한 정물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비유이자, 인간의 내면을 투영하는 상징이다. “나는 호박을 호박같이 그리려 노력한다. 어쩌면 노력하려고 호박을 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고백하는 그의 말처럼, 박 작가에게 있어 호박은 하나의 우주이며, 스스로를 발견하는 도구였다. 미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독학으로 미술을 익혔고, 때로는 밤을 지새우며 눈물을 훔치고 또 훔치며 호박을 그렸다. 그는 그렇게 자신만의 ‘진실한 그림’을 찾아갔다.
놀라운 점은 그가 그림뿐만 아니라 바이올린 연주도 독학으로 익혀 개인 연주회를 열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예술 전반에 걸쳐 스스로 길을 개척해온 그의 행보는 그야말로 ‘자연인 예술가’라 할 만하다.

그는 한 편의 우화를 들려주며 자신의 삶을 이야기했다. “절벽 위 새집이 파도에 휩쓸려 어미새가 바다를 메우려 돌을 물고 던지기 시작했대요. 나도 그런 심정으로 그림을 그리고 삶을 이해하려 노력해요.” 그의 말에는 예술이란 곧 치유이며, 그 과정 자체가 존재의 증명이자 구원임을 깨닫게 한다.
이제 박 작가는 오랜 시간 함께했던 호박 그림을 내려놓고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바로 인간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말한다. “이제는 어디 새소리 바람소리 들리는 조용한 곳에 가서, 마지막 도전이라는 각오로 그림에 몰두하고 싶다.” 호박이라는 형상을 통해 자연과 존재를 이야기했다면, 이제는 인간이라는 주제로 삶의 깊이를 더하려는 것이다.

그가 최근 구입한 고향 언덕 200평 땅은 그에게 또 다른 시작이다. “여기에 호박도 심고, 새싹도 그리고, 꽃도 그리고, 가을이면 호박을 따서 좋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요.” 말끝에는 소박하지만 뭉클한 감동이 묻어난다. 언젠가는 별들이 총총한 시골의 밤하늘 아래서, 작은 아틀리에에서 낭만을 그리는 삶을 꿈꾸는 그는 지금도 예술가로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박 작가에게 그림은 단순한 직업이나 기술이 아닌, 존재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는 묻는다. “이 글을 읽는 너는 누구냐? 나는 누구냐? 답을 정하지 말라.” 박한의 그림은 그 답 없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그리고 언젠가 우리 모두가 스스로 답을 찾도록 돕는 무언의 대화다.
40년간 호박을 그리고, 또 그리며 마침내 인간을 향해 나아가는 박한 작가. 그의 삶과 예술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그리며 살고 있는가?
<차영복 논설주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