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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라는 명칭 지우고, 신라나 진한으로 ‘왜곡’

포커스1 2025. 6. 27. 11:52

함창고녕가야를 말한다 <6> 오봉산 철제투구와 병풍산 금관

상주 병풍산에서 출토된 가야시대의 금관으로 신라보다 앞선 것으로 파악된다.

상주 문경 예천 안동을 이어주는 낙동강 언저리에는 수만 기의 가야고분이 있으며 그 속에 묻혀있던 유물유적이 뛰쳐나와 방방곡곡을 유영하고 있다. 갈 길을 잃어버린 망자의 영혼처럼 2천년 만에 다시 세상 빛을 보게 되었지만 그들은 뒷골목 어둠의 세계를 전전하고 있다.

망자의 혼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지만 망자와 함께 무덤 속에 들어갔던 유물들은 그냥 뒷골목 밀매의 대상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 유적들은 낙동강의 옛 주민인 가야인들이 만들었으며 가야표라고 인장이라도 찍어놓았을 만큼 뚜렷한 흔적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가야라는 명칭을 지우고 신라나 진한이라는 중국 삼국지의 지명을 빌려 그들의 작품으로 왜곡하고 있다. 힘창고녕가야시대 유물로는 오봉산 출토 철기투구와 갑옷, 상주 병풍산출토 금관과 초기철기유물, 상주 이부곡토성 출토 초기철기유물, 성동리고분 출토 오리형토기, 예천대심리 출토 긴목그릇받침토기 등이 있다. 특히 오봉산 출토 투구의 형태는 고령과 함안에서 출토된 가야식 투구의 전형을 나타내고 있다. 상주시 성동리 고분에서 발견된 오리형 토기 역시 가야의 제례에서 다기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야식오리형 토기의 전형이다.

병풍산에서 출토된 금관은 신라의 금관과 비슷하면서도 어쩌면 신라금관의 앞단계 모양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갖게 한다. 출자형 금관이 병풍산 줄기의 가야형 고분에서 출토된 것도 의미심장하다. 병풍산 아래에 있는 이부곡토성에서는 초기 철기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 초기 철기시대라면 대략 서기 전 2세기에서 서기 2세기 까지로 잡고 있으니 이 시기는 바로 고녕가야가 활동하던 시기와 겹친다.

예천 대심리에서 재작년 발굴된 긴목그릇받침토기는 낙동강을 따라 가야전역에서 발견되는 토기로 함창보다 위쪽에서 발견된 셈이다. 즉 가야세력권이 낙동강 전역에 분포했음을 말해주는 중요한 증거라 할 수 있다. 대심리에서는 이외에도 금귀고리, 철제갑옷, 다수의 토기 등이 발견되었다. 안동 임동면 고분에서는 금관이 발견되었는데 이 역시 발굴팀이 아닌 도굴자 손에 의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예나 지금이나 도굴하는 사람들은 배움이 일천하여 사회에서 적응할 마땅한 직업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 분 역시 배움이 적고 오직 도굴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으로서 한번은 금제 왕관을 비롯해 허리띠 등 전신을 감싸는 황금장식 일습을 발견해서 서울과 대구에 따로 밀매를 하였는데 그것이 잘못되어 수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들 세계에서도 서열이 있어 도굴자는 을이 되고 골동품상은 갑이 되는 관계로 떳떳하지 않는 도굴자의 약점을 잡고 횡포가 심하다고 한다. 그래서 협박을 당할 때도 있고 물건값을 터무니 없이 낮게 매길 때도 있다고 한다. 이 사람은 나중에 금관을 하나 더 발견했다는데 그 후의 일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들이 필자에게 하는 말 가운데서 도굴범을 양성화해서 정부나 지자체에서 유물발굴에 이용한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투정부리듯 말을 한다. 유물이 어디쯤에 묻혀있는지 누구보다도 도굴범들이 잘 안다는 논리다. 시대 구분도 이들이 더 잘 알고 있으며 더러는 전문가들도 이들에게 자문을 구하러 온다고 귀띔을 해준다.

이들의 말을 빌리자면 가야토기 분포는 낙동강 주변 도시인 안동, 의성, 예천, 함창, 상주를 비롯해서 영덕에도 많이 출토되었다고 하니 영덕은 아마 고녕가야의 사민정책과 깊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함창고녕가야를 알리는 1차자료는 <삼국사기><삼국유사>가 있고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50여 사서가 있다. 그리고 태조 고로왕릉과 왕비릉, 수천기의 가야고분, 공갈못, 대가산 등 열 손가락으로 모자랄 만큼 증거자료가 넘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함창고녕가야를 인정할 수 없어서 교과서나 유네스코 가야고분문화에 등록신청 하지않고 있다.

그 이유 가운데 지금까지 주장하고 있는 것이 가야유물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례로 태조 고로왕릉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고로왕릉이라고 무엇으로 증명하느냐는 것이다. 후손들이 수천 년간 제사 지내고 조선시대까지 지석이 있었다는 기록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배우는 역사적 사실은 무엇을 가지고 증명하고 믿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역사는 사료나 유물유적까지 부인하면서 일본사료에 나오는 지명을 우리나라 역사로 만드는 것에는 일체 비판이 없으니 분명 불순한 의도가 있음이 분명하다.

현재까지 우리나라 역사교과서는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발간한 조선사를 모본으로 하고 있다. 조선사편수회의 지침이 조선반도 남부지방은 과거 4~6세기 일본의 식민지였으며 그곳을 이름하여 가야 혹은 임나였다는 것이다. 이 지침에 따라 일제 강점기 고령군청에 임나일본부라는 간판을 내걸고 일본의 과거 흔적을 찾는 명분으로 낙동강 주변의 고분을 발굴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김해나 고령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고대 한반도 역사는 일본의 식민지 역사였음을 조선인들에게 교육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김해에서 낙동강을 따라 고령까지가 임나일본부 구역이었으며 서쪽으로는 전라도 남원과 장수도 포함했다. 즉 가야의 본거지는 낙동강 연안인데 일제는 식민정책에 따라 낙동강 대신 한반도 남부지역을 임나 혹은 가야지역으로 획정한 것이다.

상주 오봉산에서 출토된 철제투구.

그래서 고령 위쪽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성주성산가야나 함창고녕가야는 가야권역에서 제외시켰다. 특히 토기의 제작연대를 추정함에 있어서 거의모두 4세기 이후 작품으로 둔갑시켰으니 그것은 임나일본부 시절의 작품으로 확정함으로써 그 이전의 가야나 고대국가 설정을 차단하려는 의도이다.

가야형식의 무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으며 철기투구나 토기의 연대를 4세기 이후로 일괄적으로 단정하였다. 그들은 임나일본부설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초기 기록은 못 믿을 기록으로 치환하고 그 자리에 일본서기내용을 집어넣었다. 그들의 이러한 행태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아직도 고대사에 대해서는 일제의 황국사관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참고로 토기는 탄소연대측정이 불가능하므로 오로지 추측으로 결정하는 것인데 일제사학자들은 식민정책에 부합하도록 토기의 발생연대를 거의 모두 4세기 이후로 늦추어 설정했다. 그래서 함창이나 예천 등지에 출토되는 가야식 토기에 대해서 고녕가야 시대를 지난 후의 것으로 발표했다. 그렇다면 초기철기유물은 고녕가야연대와 일치하는 데 어째서 제외하냐고 따지면 철기유물은 논외로 하고 그들이 정해놓은 형태의 토기가 출토되어야 고녕가야를 입증한다는 것이다.

그런 조건이라면 일본서기의 다라를 합천이라하고 남원을 기문국이라고 하는데 그곳에 다라유물과 기문유물이 나왔느냐고 물었다. 연대상으로 그 시대 유물이 나왔다면 그 유물이 일본서기의 다라와 기문과 무슨 연관되는 기록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와 관계하여 필자가 아는 현역 모든 역사 학자들은 즉답을 회피했다.

역사는 과거의 사실을 규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미래세계를 설계하는 모본이다. 일제 강점기 일본학자들이 일본의 이익에 부합되도록 맞추어 놓은 이론을 지금까지 고집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더구나 일본서기의 기록을 우리나라에 적용하는 것은 우리 역사가 일본역사로 편입되는 형국인데 증거나 비판없이 수용하는 것이 국익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우리역사서에 기록이 엄연하고 왕조의 시조왕릉이 있고 고분이 수천기 있고 수많은 유물유적이 출토되었는데도 부정하려는 의도가 얼마나 혼 빠진 행태인지 모른다 말인가? 상주, 안동에서 출토된 희귀한 가야토기들이 전국으로 떠돌고 있지만 거기에 대한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자가 전무하다는 현실이 안타깝다.

나일강 따라 만 리를 이어지는 아시리스 신전을 여행하면서 그것과 비교가 불가할 정도의 작은 낙동강을 두고 고령 이하는 가야이고 고령 위쪽은 진한소국이라 주장하는 학자들은 눈을 좀 더 크게 뜨고 보기를 바라는 바다. 역사를 있는대로 바로 보고, 국익 차원에서 바라봐야 미래를 향한 설계도를 작성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정스님 문경 봉천사 주지

상주문경함창 고녕가야선양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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