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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잡

자화상

<자화상>
            /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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