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 전, 나는 함창 버스터미널 벽보에 게시된 고녕가야 태조 고로왕릉 사진을 보고 현장에 가보았다. 걸어서 불과 10분 거리에 있는 증촌리 고녕가야 태조왕릉은 위풍도 당당하게 시내 중앙 언덕에 안치되어 있다. 왕릉 앞 설명 간판에는 조선 선조 때 무덤 앞에서 묘지석을 발견한 사실과 수리한 연혁을 적어놓았다. 그 후 숙종 때 왕명으로 상석을 비롯하여 주위를 정비했다는 내용도 적혀있었다.
그로부터 30년 후 다시 고녕가야 태조왕릉 앞에 서자 고녕가야에 대한 깊은 의문이 생겼다. 주변의 역사 선생들께 문의해 보았지만 별로 소득이 없었다. 《삼국사기》에는 무려 다섯 줄에 이르는 문장으로 함창 2천여 년간의 지명 변화와 함창이 고녕가야의 도읍이며 휘하에 문경을 비롯한 가은현, 호계현을 거느린 낙동강 상류 내륙의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녕군은 본래 고녕가야국에서 비롯되었다. 신라가 이를 취해서 고동람군으로 만들었으며 일명 고릉현이라고도 했다. 다스리는 속현이 셋이 있으니 먼저 가선현은 원래 가해현인데 경덕왕이 개명을 했으며 지금은 가은현이라고 한다. 다음 관문현은 관현이라고도 했으며 경덕왕이 개명을 하여 지금은 문경현이 되었다. 다음 호계현은 호측현이라고도 했으며 경덕왕이 개명을 했으며 지금(고려)까지 그대로 쓰고 있다." (《삼국사기》〈잡지〉 제3 '지리(地理) 신라(新羅) 고령군' 조)
여기에서 ‘지금’은 김부식 등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시기, 즉 서기 12세기 중반을 말한다. 그 당시 쓰여진 가은, 문경, 호계는 800년이 지난 21세기에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 《삼국유사》에도 “6란이 부화하여 첫째는 수로왕이 되고 나머지 다섯도 각각 국주가 되었다. 두 번째가 함안 아라가야이며, 세 번째가 고녕가야로써 현재 함녕이다.” 라고 적시했다.
내가 배운 가야는 경상남도 일대인데, 《삼국사기》·《삼국유사》의 내용과 낙동강 상류인 함창에 고녕가야 왕릉이 있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삼국사기》·《삼국유사》의 내용을 부정할 근거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를 두고 이병도 박사는 함녕(현 함창)보다는 진주가 고녕가야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주장했다. 이병도는 함창 대신 진주 고녕가야를 언급하는 근거로 김해와의 거리, 고지명, 지리적 중요성을 들었다. 그러나 김해에서 함창까지의 거리는 300km 남짓이며, 낙동강 수운이 잘 발달해 있다. 이병도 박사는 지리적 중요성이라면서 웅주 거목을 들었지만, 웅주 거목은 원래 상주 함창의 이칭이다. 그 의미는 물자가 풍부한 큰 고을일 뿐 아니라 인류 고대사와도 연결될 법한 은자(銀尺)의 고장, 즉 남성의 기상을 뜻한다.
이병도 박사뿐만 아니라 그의 학맥을 이어받았다고 자칭타칭 일컬어지는 김태식 교수의 《가야 연맹사》를 두 번이나 탐독을 해보아도 역시 수긍이 안 된다. 가야사의 일인자라 일컬어지는 이영식의 《가야 제국사 연구》를 탐독하여도 역시 수긍이 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들은 한결같이 고녕가야는 허구이거나 일연선사의 자기과시 내지는 조작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로는 김해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주된 골자였다. 김해에서 함창까지는 낙동강 수운이 발달해 있어 고대는 물론 근세까지도 소금 배가 드나들 만큼 교역이 활발했다. 그들은 함창은 가야에서 제외하면서 전라도 남원이나 장수는 가야 문화지역이라고 공식적으로 주장하고 교과서에도 언급했다. 오히려 장수, 남원은 김해나 고령에서 보면 산 넘고 들을 지나야 할 만큼, 함창보다 훨씬 교통이 불편함에도 비판없이 수용했다.
또 한 가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은, 함창 고녕가야를 제외하면서 《일본서기》의 지명과 중국정사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오는 지명을 가야 지역에 적용하는 것이다. 고려 정부에서 정식으로 편찬한 《삼국사기》와 우리 선조가 쓴 《삼국유사》에 구체적으로 적시하는 지명은 외면하고, 다른 나라에서 편찬한 《일본서기》와 《삼국지》의 지명을 인용한단 말인가? 일천한 나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수긍할 수 없어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원전을 수십 번 읽으면서 그 의미를 찾아보았다. 고대 난자(難字)를 찾아가면서 5~60번 읽으니 전체 윤곽이 드러나면서 저들의 저의를 알 수 있었다. 저의뿐만 아니라 동이전에 나오는 삼한의 강역과 가야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에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삼국지》는 진수에 의해서 3세기에 편찬되었는데, 한반도 남부에 있는 지형과 사실을 설명했다고는 볼 수 없다. 먼저 변한의 변진구야국을 김해로 상정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모순이다. 변한의 위치를 경남으로 잡는다는 것이 무리며 ‘변진구야국’에서 ‘구야’가 ‘가야’와 발음이 비슷하다고 해서 가야를 대표하는 지역인 김해에 비정한 것도 납득할 수 없다. ‘구야한국’이라는 지명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왜전(倭傳)’에 나오는 내용인데 ‘구야’와 ‘한국’이라는 낱말이 가야와 낯설지 않다는 이유로 김해에 비정했다. 즉 변한의 변진구야국이 왜전의 구야한국과 같이 김해로 지정받은 셈이다.
이보다 더 황당한 것은 《삼국지》에서 삼한을 설명하는 대목에 있어 한나라를 중심으로 부여 ·고구려·옥저·동예 등이 등장한 다음에 삼한이 나오고 왜가 나온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영토의 넓이와 인구 호수에 대해 말하길 부여는 방 2천 리, 1만 호, 고구려는 방 2천 리, 2만 호, 옥저와 동예는 방 1천 리, 1만 호인데 비해 삼한은 방 4천 리, 15만 호로 기록되어 있다. 단순 비교로 보더라도 삼한은 고구려보다 4배나 면적이 넓으며 가구 수는 무려 7.5배에 이른다. 《삼국지》의 기록, 최치원의 《계원필경》, 청나라 정사인 《만주원류고》를 보더라도 삼한의 위치는 하북성을 비롯하여 동북삼성(東北三省)과 한반도 전체를 아우른다. 사실이 이러하거늘 조선말 사대주의자 한백겸이 제시한 ‘한강 이남의 삼한론’ 을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채용하였고, 다시 한국 사학자들이 식민사학자들의 영향 아래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누가)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삼한전’을 왜곡한 이유는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 지명을 조선에 상륙시키기 위한 마중물이라는 것이다. 그간 고녕가야를 찾아가는 여정을 따라가 보니 함창 고녕가야를 처음 부정한 것은 이병도가 아니라 나가 미치오(那伽通世)였으며 두 번째로는 쓰에마쓰 야스카즈(津田左右吉)였다. 그들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김해와 거리가 멀다는 것이고, 둘째는 고려시대 일연선사가 자국사를 치켜세우기 위해 없던 고녕가야 등 육가야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4~6세기 왜가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는 임나일본부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에게서 교육받고 훈육된 이병도는 식민사학의 태두가 되어 한국사를 일본의 변경사로 둔갑시켰으며, 지금까지도 그 여파가 미치고 있다.
이후 5년간 필자는 동국대학교 불교사학회 등과 함께 함창 고녕가야 학술대회를 5회 열었으며 ‘가야사 전국연대’와 함께 2회의 집회를 했다. 이와는 별도로 진단학회,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사학회, 국사편찬위원회, 가야사학회, 중앙박물관 등에 2회 이상의 공문을 보냈다. 함창 고녕가야를 부정할 만한 근거와 그에 준하여 《일본서기》의 ‘다라’와 ‘기문’ 등을 합천이나 남원에 비정할 수 있는 근거를 대라는 공문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납득할 만한 회신은 없고, 논문으로 발표하라는 주문이 두어 군데 있었다. 특히 이병도 박사 중심으로 설립된 진단학회는 당시 김태식 교수가 총무로 있었기 때문에 ‘논문으로 따지기 전에, 이병도 박사나 김태식 교수의 논문이 천년을 이어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을 뒤집을 만큼 정합성이 있느냐?’고 다시 회신을 보냈다.
그들은 시조와 시조 왕비릉이 현전하고, 그에 대한 기록이 버젓이 있으며, 고분군, 토성, 저수지 등 예부터 전해오는 지명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함창 고녕가야를 부정하고 있다. 반면 시조도 없고 시조묘도 없으며 우리 역사서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합천=다라국과 남원=기문국은 목숨을 걸고 견지하고 있다. 정말 기가 차서 말문이 막힐 희한한 일들이 21세기의 대한민국 사학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모든 낭패의 원인은 우리가 나라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본다. 어떤 이는 해방 후 친일 청산을 못 한 데서 원인을 찾으려 하지만 그것은 면피용 수사에 불과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나라를 지켜야 하며 목숨을 걸고 이를 견지해야 한다.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고 역사를 유린당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며, 사후 약방문처럼 나라를 잃고 변명을 늘어놓는 나약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지정 스님 상주함창문경 고녕가야선양회 대표 봉천사주지
'상주포커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검찰, 文 소환통보...뇌물수수혐의 (0) | 2025.03.29 |
---|---|
상주 함창, 고녕가야국 태조 고로대왕 대제 봉행 (0) | 2025.03.29 |
경북도, 산불피해 회복을 위한 5대 추진방향 발표 (0) | 2025.03.28 |
경북5개시군,산불진화 현황(3.28일09시현재) (0) | 2025.03.28 |
[속보]산림청, 의성산불 진화상황 브리핑 (0) | 2025.0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