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도 사람은 겸손하기가 참 어려운 동물이라고 여러 곳에 기록했다.
한여름의 잡초처럼 매일 같이 발로 꾹꾹 밟아주지 않으면 순식간에 웃자라 버리는, 그것이 잡초의 성질이고 사람의 교만이다.
평생을 머리 조아리다 말도 제대로 못 하던 사람이 돈 좀 벌었다고 거덜대고,
작은 감투 하나에 큰 벼슬이라도 한양 목에 빳빳하게 풀을 먹이고 우쭐되는 걸 보면 교만만큼 인간의 본성이 뚜렷한 것도 없어 보인다.
교만이 ‘일만 악의 뿌리’이고 ‘패망의 앞잡이’란 가르침이 끊이질 않지만 인류의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다.
인류의 흥망성쇠가 교만의 악순환에서 비롯됨이니 사람이 언제라야 창조주의 뜻에 맞추어 겸손해 질까?
사람의 겸손과 교만은 말하는 것에서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자기 말만 앞세우고 남의 말을 무시하거나, 박수를 치는 것보다 박수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겸손하다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 교만과 겸손을 구분하는 방법은 죽음에 대한 인식에서 좀 더 다가설 수 있다.
짧은 생을 살다가는 인생임을 아는 사람은 마치 천년을 살 것처럼 나대지 않으니까.
말에는 묘한 힘이 있고 향이 나는 말이 있다.
라틴어에는 그러한 철학적 의미를 함의한 문장이 많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사는 곳엔 때리고 때려도 솟아오르는 두더지처럼 뿌리가 뽑히지 않는 것이 교만이다.
마음을 휘어잡는 짧은 문장들….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아모르파티>, <화무십일홍>까지 모든 문장은 한결같이 겸손한 삶을 이르고 있다.
그것이 인간이 상기해야 할 본분임을 깨친다.
생명이 너의 코에 달려 있다. 날숨 한 번 뱉었다가 들이키지 못하면 죽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새똥 하나를 피하지 못하는 게 연약한 사람이다.
그러니 교만하지 말고 매 순간 삶을 성찰하며 살라고 이른다.
죽음을 기억하고 운명을 사랑하고 오늘에 충실하라고...
알쓸신잡
교만.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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