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시 중심가 한복판, 지금은 상점 일부가 철거되고 주차장으로 변해버린 평범한 거리. 하지만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이곳은 늘 사람 냄새와 웃음소리, 때론 술기운이 가득하던 살아 숨 쉬는 골목이었다. 지금은 ‘왕산골목’이라 불리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곳을 더 구체적으로 기억한다. ‘소주골목’, ‘상주극장골목’, 그리고 ‘문화원골목’. 각각의 골목에는 저마다의 사연과 색깔이 있었다.
소주골목은 이름 그대로 주당들의 아지트였다. 허름하지만 정겨운 선술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퇴근한 직장인들, 장사를 마친 상인들, 때로는 군복을 입은 젊은이들까지도 한 잔 술에 마음을 풀어놓던 곳이다. 밤이면 술잔 부딪히는 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골목 끝까지 이어졌고, 자연스레 사람 사이의 거리는 가까워졌다.
상주극장골목은 늘 북적였다. 주말마다 개봉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고,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 가족 단위의 나들이객들이 넘쳐났다. 어린 시절 처음 본 영화의 장면과 함께 기억되는 그 극장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 추억의 일부였다. 극장을 나오며 들렀던 분식집, 포장마차, 구멍가게 하나하나에도 따뜻한 기억이 담겨 있다.
조금은 다른 분위기의 문화원골목도 있었다. 상주문화원이 자리했던 이곳은 낮에는 문화강좌와 공연이 열리던 공간이었지만, 밤이 되면 분위기가 달라졌다. 지역에서는 ‘사창가’로 불렸던 골목. 그곳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외면하지 않던 시절. 골목회 사람들은 그곳 역시 골목의 일부로 포용했다. 좋든 나쁘든, 모든 삶의 단면이 섞여 있던 그 골목이야말로 진짜 ‘도시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각기 다른 색깔을 지닌 골목들이 하나의 결로 이어져 만들어진 공동체가 바로 ‘왕산골목회’다. 1991년, 새서울사진관을 운영하던 고)지정수 씨를 중심으로 시작된 이 모임은, 그저 “우리 골목은 우리가 지킨다”는 작은 다짐에서 출발했다. 청소, 태극기 달기, 그리고 서로 안부를 묻는 일상적인 활동이 이어지면서, 골목 사람들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유대가 생겼다.
성시택 회장은 이 공동체를 초창기부터 지켜온 인물이다. “우린 다 달랐어요. 장사하는 업종도, 사는 방식도. 그런데 서로 믿고 챙기다 보니 가족 같은 사이가 되었죠.” 그의 말처럼 왕산골목회는 34년 동안 큰 소리 한 번 없이, 묵묵히 서로를 위로하고 사랑해온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단지 골목을 청소하고 회식을 즐기는 모임이 아니었다. 매년 성동보육원을 찾아가 따뜻한 손길을 건네고, 형편이 어려운 이웃들을 도왔다. 봉사라는 말조차 어색할 만큼, 이들에게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진심은 새마을중앙회장 표창으로 공식 인정받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소중한 건 사람들 사이에 쌓인 신뢰와 애정이다.
봄과 가을, 어김없이 열리는 야유회는 단순한 나들이가 아니다. 그간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건강을 확인하며, 여전히 ‘우리’라는 이름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세월 따라 상점은 줄고, 골목의 빛깔도 바래갔지만, 사람들의 마음만은 여전히 반짝인다.
이제 왕산골목은 과거의 번화함을 지녔던 골목이 아니라, 한결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지켜온 사람들이 만든 살아 있는 유산이다. 누군가에겐 그저 스쳐 지나는 거리일지 몰라도, 이 골목을 함께 살아낸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중심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34년이라는 시간 동안 변하지 않은 단 하나는, 이들의 ‘사람 냄새 나는 마음’이다. 그 마음 덕분에 골목은 여전히 따뜻하다. 그리고 그 마음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골목에는, 아직 사람이 살고 있습니까?”
<차영복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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