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이 하나 되어 '상주 북천 전투'
동학농민군은 상주읍성을 점거.
역사를 돌이켜보면 상주에서는 대변란기에 수많은 이름 모를 영령들이 죽어갔다. 얼마나 많은 죽임을 당하였는지 알 수 조차 없다. 그리고 우리는 선조들에 대한 혼령을 잘 위로하고 있는지 한번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 대표적 사건이 임진왜란과 동학혁명이다.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자 이 소식을 듣고 순변사 이일 이 이끄는 중앙군은 4월 23일 상주에 도착하게 된다. 중앙군은 불과 60여 명뿐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상주에서 800여 명의 민초들이 창의해 의병으로 나선다. 하지만 조총으로 무장한 1만 7천여 명의 왜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순변사 이일은 도주하고, 상주 판관 권길, 사근도 찰방 김종무, 의병장 김준신 등과 상주 의병들은 죽기로 맹세하고 역전 분투하다 순국한다
이것이 임진왜란 시 최초로 관군과 백성이 하나 되어 전투를 벌인 '상주북천전투'의 역사이다.
300년 후,
1894년 9월 18일 동학 교주 최시형이 기포령을 내리자 상주의 동학 지도자들은 즉각 봉기하였다. 수천 명의 동학농민군은 9월 22일 상주읍성을 점거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객관에 모여 있었다. 당시 상주와 같은 대읍이 일시라도 점거된 경우는 드문 예였다. 상주목사 윤태원은 발령을 받아 인수인계 준비를 하다가 혼비백산하고 향리들과 함께 도피하였다.
9월 28일 10시경 낙동병 참부 일본군은 성벽을 기어올라 읍성을 기습하여 수많은 동학농민군을 희생시키고 읍성을 점령하였다. 이후 중앙에서는 소모사를 선임하고 동학군을 진압하게 되는데 붙잡힌 동학군은 무참히 참살당하고 그 시신은 북천 냇가를 지나 지금의 아리랑고개 공동묘지에 버려지게 된다.
이러한 수천수만의 이름 모를 영혼들이 아직도 상주의 구천을 떠돌고 다닌다. 상주가 호국의 성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러한 영혼들을 잘 달래는 일부터 해야 한다. 안동의 경우 임진왜란 때 전투한 번 치른 적이 없는 곳이다. 그러나 서해 유성룡의 '징비록'이 떠면서 임진왜란의 성지가 되고 있는 모양새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 조상들의 결기와 역사적 사실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후세들에게 지역의 역사적 교훈을 가르치고 자긍심을 심어주어 애향심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과거를 모르면 미래가 없다. 과거의 역사를 되짚어 보고 새로운 상주로 도약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아침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COVID-19. 各自圖生> (1) | 2020.03.18 |
---|---|
<교육재정을 지방행정에 통합하라> (0) | 2020.03.18 |
<경제에 올인하자> (0) | 2020.03.18 |
<역대 상주시장들> (0) | 2020.03.13 |
<지도자 선택> (0) | 2020.03.13 |